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안사의 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안사의 난은 당나라 말기 발생한 대규모 반란으로, 당나라의 쇠퇴를 가속화시킨 사건이다. 당나라 율령제의 변질, 환관과 외척의 전횡, 농민의 소외 등이 원인이 되어, 안록산이 755년 반란을 일으켰다. 안록산은 연(燕)나라를 세우고 낙양과 장안을 점령했으나, 그의 부하와 아들의 배신으로 사망하고, 사사명이 뒤를 이었으나 사조의에게 살해당하며 763년 진압되었다.

안사의 난은 당나라의 인구 감소, 절도사(節度使) 권력 강화, 위구르 제국과 티베트의 대두 등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는 이후 절도사들의 할거와 황소의 난을 겪으며 멸망했고, 주변 국가인 위구르, 일본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연 (안사) - 주차 (당나라)
    당나라 중기의 인물인 주치는 군사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를 칭했으나 당나라 군대에 패배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뛰어난 무예와 통솔력으로 당나라 조정에서 관료 및 장군으로 활동하다가 경원 군인들의 반란을 틈타 황제에 즉위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살해당했다.
안사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안사의 난
안사의 난 지도
안사의 난 당시 군사 이동 경로
발생일755년 12월 16일
종료일763년 2월 17일
장소중국 북부
결과당나라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당나라
위구르 카간국
교전국 2연나라
지휘관
교전국 1 지휘관당 현종
당 숙종
당 대종
곽자의
이보옥
봉상청
고선지
가서한
이광필
장순
이사업
복고회은
우조은
안진경
혼간
교전국 2 지휘관안록산
안경서
사사명
사조의 (자살)
장효충
왕무준
설송
장중지
이회선
전승사
전신공 (배신)
고거인 (반란)
병력
교전국 1 병력60만-70만 명 (최대)
교전국 2 병력20만-30만 명 (최대)
사상자
사상자매우 많음 (불확실, 상세 정보는 사망자 수를 참조)
영향
결과당나라의 지방 통제력 약화 및 중앙아시아 주도권 상실
관련 정보
원인당나라의 율령제 붕괴

2. 원인

안사의 난은 당나라 현종 시기에 안녹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반란으로, 당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적 혼란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 정치적 요인: 당나라 말기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이 원인이었다. 개원의 치를 이끌었던 현종양귀비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고력사 등의 환관양국충 등 외척이 득세하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다.
  • 군사적 요인: 안녹산은 소그드인 아버지와 돌궐족 어머니를 둔 혼혈 출신으로, 당 현종의 신임을 얻어 북방 세 지역의 절도사를 겸임하며 막강한 군사력을 장악했다.
  • 사회·경제적 요인: 현종양귀비의 사치, 환관과 외척의 전횡, 부패한 관리들의 수탈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측천무후 때 억압되었던 귀족 세력이 다시 집권하면서 지배층 내부 갈등도 심화되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여 안사의 난이 발발하게 되었다.

당나라 삼채(三彩) 도자기 낙타와 소그드인 마부


안사의 난 이전 10대 절도사

2. 1. 정치적 요인

당나라 말기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이 원인이었다. 개원의 치를 이끌었던 현종양귀비에게 빠졌다. 무혜비를 잃고 왕자들을 억울하게 죽게 해 가슴 아파하던 현종은 전국에 화조사(花鳥使)를 파견하여 미녀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궁중에 무혜비의 소생인 수왕의 비 양옥환에게 반했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수왕과 양옥환을 이혼시켰다. 그리고 양옥환을 도교 사원에 있게 한 후 다시 궁중에 불러들여 귀비로 삼았다. 그는 밤낮으로 양귀비와 놀고 먹으며 그녀가 말하는 것은 다 들어주었다. 백거이(白居易)가 〈장한가(長恨歌)〉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궁정에서 환락의 생활에 빠졌다.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재물은 물론 권력까지 넘겨주는 일을 서슴없이 행한 현종은 여산(驪山)의 온천에 있는 별궁을 수리하여 화청궁(華淸宮)이라 하고, 사시사철 그곳에서 지냈다. 현종은 정치를 고력사 등의 환관에게 넘겼고, 이로 인해 양국충 등 외척과 환관들의 본격적인 환관-외척 정치가 시작되었다. 현종은 양귀비에게 빠져 있었고 그로 인해 현종이 넘겨준 정치권력을 손에 넣은 재상 이임보는 양귀비를 조종하여 독재정치를 하였다. 현종은 명신 장구령의 충언은 무시하고 이임보만 절대적으로 신임하였는데, 그로 인해 746년 과거 응시자를 전원 탈락시키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그보다 우수한 관리가 나오면 그의 정치가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임보가 죽은 후 양귀비의 사촌인 양국충이 재상이 되었는데, 현종은 양국충뿐 아니라 양귀비의 언니들 세 명에게도 호화 저택을 하사하고, 그 친척들을 고관으로 임명하는 등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으며, 권력 다툼은 결국 755년 안녹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된다.[88]

부패한 관리와 환관정치로 인해 수탈당한 농민의 소외로 자립 소농민층이 해체된 것도 원인이다. 해체된 자립 소농민층은 유민화되었다.

당나라는 측천무후 때 억압된 귀족 세력이 현종 때에 다시 집권했다. 구 집권층과 지주, 상인층 출신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742년부터 유라시아는 13년간 주요 정치적 혼란기에 접어들었으며, 지역 제국들은 일반적으로 "주요 반란, 혁명 또는 왕조 변화"를 겪었다. 이 해에 동쪽 유라시아 초원의 제2 투르크 카간국이 붕괴되었고, 이후 소그드의 영향을 받은 위구르 지배자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는 실크로드로 종종 언급되는 국제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과 장사꾼들이 주도하거나 밀접하게 관련된 여러 혁명적 사건 중 첫 번째였던 것으로 보인다. 747년, 압바스 칼리파는 메르브(호라산)에서 우마이야 칼리파에 대한 반란을 시작하여, 약 750년에 새로운 압바스 칼리프를 선포했다. 이 반란 또한 상인으로 자신을 밝힌 상인과 사람들에 의해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서쪽 확장은 751년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대규모 원정대가 현재 페르가나 계곡에서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막혔는데, 압바스의 승리는 전투 중 카를루크 투르크의 배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전투 후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당나라는 안사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중앙아시아 영토를 유지했다.

또한 당나라의 남쪽 확장은 난조국의 효과적이지 못하고 심지어 파괴적인 원정으로 인해 제한되었다. 그러나 당나라의 티베트 제국에 대한 동시 원정은 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티베트인들의 중앙아시아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원정은 거의 성공적인 것으로 보였다. 755년 티베트 정치 내부의 주요 반란 중에 티베트 황제 메 아그촘이 암살됨에 따라, 티베트 제국에 대한 당나라의 최종 승리는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점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국 본토에서는 소그드-투르크계 장군 안록산이 당 현종 황제와 그의 황후 양귀비의 신임을 얻었다.

안녹산(安祿山)은 출생 배경이 불확실하지만 소그드(Sogdiana)인 아버지와 돌궐(Göktürk)족 아시나(Ashina) 부족 어머니에게 입양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그는 중국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다. 그의 성공은 당 현종(唐玄宗)이 751년 수도 장안(長安)에 그를 위해 지어준 호화로운 저택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저택에는 금은 제품과 길이 약 3.05m, 폭 약 1.83m의 값비싼 침상이 놓여 있었고, 희귀하고 비싼 침향(sandalwood)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는 현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 양귀비(楊貴妃)의 권유와 재상 이림보(李林甫)의 동의를 얻어 북쪽의 평로(平盧), 범양(范陽), 하동(河東) 세 지역의 절도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사실상 안록산은 황하(黃河) 하류 북쪽 지역 전체와 16만 4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당 궁정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한 민중의 불만, 아바스(Abbasid) 혁명(이 혁명에는 소그드인이 관여했다), 그리고 결국 궁궐을 지키는 강력한 군대의 부재와 일련의 자연재해 등 여러 상황을 이용했다. 안록산은 당 궁정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현종과의 긴밀한 관계로 황후 양귀비에게 입양되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 양씨 가문(당 황제가 혼인했던 이전 수(隋)나라의 가문) 구성원들의 권력은 중요했고, 특히 양귀비의 친척인 양국충(楊國忠)이 당 정부 행정부에 있었던 것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3]

안록산은 서역사마르칸트 출신으로, 소그드인돌궐의 혼혈이었다. 무역 관계의 업무로 당나라에 벼슬하여 두각을 나타내, 재상인 이림보와 가까워지고, 현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었으며, 더 나아가 현종의 총애를 받는 양귀비에게까지 환심을 사, 범양을 비롯한 북방 변방 지역(현재의 허베이성베이징시 주변)의 세 개의 절도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사사명은 안록산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마찬가지로 무역 관계의 일로 두각을 나타내, 안록산의 보좌역으로 그에게 섬기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2. 군사적 요인



안록산은 출생 배경이 불확실하지만 소그드인 아버지와 돌궐아시나 부족 어머니에게 입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다. 751년 현종이 수도 장안에 지어준 호화로운 저택에는 금은 제품과 길이 약 3.05m, 폭 약 1.83m의 값비싼 침상이 놓여 있었고, 희귀하고 비싼 침향(sandalwood)이 장식되어 있었다.[3]

안록산현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 양귀비의 권유와 재상 이린복의 동의를 얻어 북쪽의 평로, 범양, 하동 세 지역의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사실상 황하 하류 북쪽 지역 전체와 16만 4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당 궁정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한 민중의 불만, 아바스 혁명(이 혁명에는 소그드인이 관여했다), 궁궐을 지키는 강력한 군대의 부재, 그리고 일련의 자연재해 등 여러 상황을 이용했다. 안록산은 당 궁정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현종과의 긴밀한 관계로 양귀비에게 입양되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 양씨 가문(당 황제가 혼인했던 이전 수나라의 가문) 구성원들의 권력은 중요했고, 특히 양귀비의 친척인 양국충이 당 정부 행정부에 있었던 것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3]

2. 3. 사회·경제적 요인

당나라 말기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이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개원의 치를 이끌었던 현종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락에 빠졌다. 이로 인해 고력사 등 환관양국충 등 외척의 득세로 이어져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다.[88] 현종은 양귀비에게 빠져 정치를 환관들에게 넘겼고, 이로 인해 양국충 등 외척과 환관들의 본격적인 환관-외척정치가 시작되었다. 현종은 장구령의 충언은 무시하고 이임보만 절대적으로 신임하였는데, 746년 과거 응시자를 전원 탈락시키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임보가 죽고 난 후 양귀비의 사촌인 양국충이 재상이 되었는데, 현종은 양국충뿐 아니라 양귀비의 언니들 세 명에게도 호화 저택을 하사하고, 그 친척들을 고관으로 임명하는 등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88]

부패한 관리와 환관 정치로 인해 수탈당한 농민들은 소외되었고, 자립 소농민층은 해체되어 유민화되었다.

당나라는 측천무후 때 억압된 귀족 세력이 현종 때에 다시 집권하면서 구 지배층과 지주, 상인층 출신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742년부터 13년간 유라시아 지역은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각 지역 제국들은 반란, 혁명, 왕조 변화 등을 경험했다. 동쪽 유라시아 초원의 제2 투르크 카간국이 붕괴되고, 소그드의 영향을 받은 위구르 지배자들이 등장했다. 이는 실크로드로 불리는 국제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 장사꾼들과 관련된 여러 혁명적 사건의 시작이었다. 747년, 압바스 칼리파는 메르브(호라산)에서 우마이야 칼리파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750년에 새로운 압바스 칼리프를 선포했다. 이 반란 또한 상인들이 주도했다.

751년, 당나라의 서쪽 확장은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원정대가 패배하면서 중단되었다. 이 전투에서 카를루크 투르크의 배신으로 압바스가 승리했지만, 아랍인들은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당나라는 안사의 난 이전까지 중앙아시아 영토를 유지했다.

당나라의 남쪽 확장은 난조국에 대한 원정 실패로 제한되었지만, 티베트 제국에 대한 원정은 성공적이었다. 755년 티베트 황제 메 아그촘이 암살되면서 당나라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소그드-투르크계 장군 안녹산이 당 현종과 양귀비의 신임을 얻으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안녹산은 소그드인 아버지와 돌궐족 어머니에게 입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 현종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다. 751년 현종은 수도 장안에 안녹산을 위한 호화로운 저택을 지어주었는데, 저택에는 금은 제품과 값비싼 침향(sandalwood)으로 장식된 약 3.05m 길이, 약 1.83m 폭의 침상이 있었다.

안녹산은 현종의 후궁 양귀비의 권유와 재상 이림보의 동의로 평로, 범양, 하동 세 지역의 절도사에 임명되어 황하 하류 북쪽 지역 전체와 16만 4천 명의 병력을 장악했다. 그는 당 궁정의 사치, 아바스 혁명, 궁궐 수비군의 부재, 자연재해 등 여러 상황을 이용했다. 안녹산은 당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현종과의 관계로 양귀비에게 입양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씨 가문(당 황제가 혼인했던 이전 수나라 가문)의 권력, 특히 양귀비의 친척인 양국충의 당 정부 행정부에서의 영향력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3]

안녹산은 서역사마르칸트 출신으로, 소그드인돌궐의 혼혈이었다. 무역 관계로 당나라에서 벼슬하여 재상 이림보와 가까워지고, 현종과 양귀비의 신임을 얻어 범양을 비롯한 북방 변방 지역(현재의 허베이성베이징시 주변)의 세 절도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사사명은 안녹산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무역 관계로 두각을 나타내 안녹산의 보좌역으로 섬기게 되었다.

3. 과정

755년 안녹산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756년 1월 안녹산은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연(燕)이라 칭하고, 6월에는 장안을 점령하였다. 756년 7월, 양국충이 처형되고 양귀비가 자살하였다.

757년 위구르족이 장안을 정복하고 유린하는 동안, 안녹산은 그의 맏아들인 안경서에게 사형당했다. 759년 안경서는 안녹산의 부장이던 사사명에게, 761년 사사명은 맏아들 사조의에게 사형당했다.

762년 당 현종이 사망하고, 763년 사조의가 자살하면서 안사의 난은 평정되었다.

안사의 난은 현종, 숙종, 대종 세 황제의 통치 기간에 걸쳐 일어났으며, 연나라의 네 황제를 포함한다.

리 자오다오(651~716)의 화풍을 따른 11세기 그림으로, 당 현종이 장안의 폭력을 피해 사천성으로 피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많은 화가들이 이 그림을 여러 버전으로 그렸는데, 명나라의 구영의 작품도 포함된다.


반란군이 장안의 황궁을 위협하자, 당 현종은 사천(四川)으로 피신하여 당군이 재정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장안에서 사천까지의 여정은 험난하였으며, 섬서성 시안양의 흥평에 있는 마외객잔(馬嵬驛)에서 현종의 호위병들이 양국충과 양귀비를 죽일 것을 요구했다. 결국 양국충과 그의 아들, 양귀비의 자매들이 죽임을 당했고, 양귀비는 교살되었다. 현종은 성도(成都)로 도망쳤고, 태자 이항(李亨)은 령주(寧夏省의 령무)로 도망쳐 황제로 선포되었다.

파란색 화살표는 반란군의 진군로, 빨간색은 당나라 군대


이임보(李林甫) 사후, 재상이 된 양국충(양귀비의 외종사촌)과의 대립이 심화되어 위험을 느낀 안록산은 755년 11월에 반란을 일으켰다.[7]

3. 1. 안녹산의 거병과 초기 전개 (755년 ~ 756년)

755년 안녹산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65] 당시 안녹산은 당나라 국군의 상당 부분 병력을 현종으로부터 위임받았는데, 친위대 8000기, 번한 10만~15만의 군단으로 구성되었다. 사사명, 안경서(안녹산의 차남), 엄장, 고상, 아사나승경, 손효철 등이 참여했다.[65]

당나라 정부군은 평화에 익숙해져 전혀 쓸모가 없었고, 안녹산 군은 봉기 후 불과 한 달 만에 당나라의 부도(副都)라 할 수 있는 낙양을 함락시켰다. 756년 정월, 안녹산은 '''대연 성무황제'''(大燕 聖武皇帝)를 자칭하고 연나라 건국을 선포했다.[65]

그러나 756년 봄에 벌어진 용추 전투에서 안록산 측 반란군은 당나라 정규군에게 패배하여 계획이 일시적으로 실패한다. 안녹산의 부하 장수 령호조가 이끄는 반란군은 당나라 장군 장순이 이끄는 정규군에 비해 압도적인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옹구와 수양을 점령하지 못했고, 당나라가 세력을 회복할 때까지 연나라가 중국 남부를 정복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연나라는 757년 수양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할 때까지 수양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다.

756년 7월, 안녹산과 그의 반군은 장안을 함락시켰다.

3. 2. 당나라의 반격과 교착 상태 (756년 ~ 759년)

756년 1월, 안녹산은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연(燕)이라 칭했다. 같은 해 6월 장안을 점령하고, 7월에는 양국충이 처형되고 양귀비가 자살하는 마외역의 비극(馬嵬駅の悲劇)이 발생했다.[65] 실의에 빠진 현종은 퇴위하고, 황태자(皇太子) 이형(李亨)이 영무(靈武)에서 숙종으로 즉위하여 반란 진압을 지휘하게 되었다.[65]

당 숙종은 장군 곽자의와 이광비를 임명하여 반란을 진압하고자 했다. 이들은 바얀추르 칸이 다스리던(759년 여름 사망) 위구르 카간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아바스 칼리프 알-만수르가 파견한 3,000명의 아랍 용병도 당나라에 합류했다.[8]

756년 9월, 숙종은 위구르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몽골리아에 사자로 돈황왕 이승규와 구성철륵 묵골부 출신 묵골회은, 소그드계 번장 석정번 등을 파견했다.[66] 10월, 오르도 발릭 회견에서 위구르 제국 제2대 칸 갈륵가한은 요청을 수락했다.

756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안록산군의 번장 아사나승경은 자신이 돌궐 왕족 출신이었던 것을 이용하여 돌궐·동라(同羅)·묵골군 5000기병을 이끌고 장안에서 북쪽으로 진군하여 숙종이 있던 영무를 공격했다.[67]

갈륵가한이 이끄는 위구르군과 당의 곽자의군은 합류하여 아사나승경군을 격파했다.[67]

756년, 압바스 칼리파국의 칼리프 만수르는 당을 지원하기 위해 4000명의 아랍 군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전후 중국에 주둔했다.[68][69][70][71][72]

757년, 위구르족의 지원을 받은 당나라 군대는 장안과 낙양을 탈환했지만, 반란군은 북동쪽 중심지로 도망쳤다. 758년, 위구르 카간국 외교관들은 장안에서 아랍 아바스 왕조 외교관들과 외교 사절단 회의장 입장 순서를 두고 충돌하기도 했다.[9][10]

한편, 당군은 낙양에서 통관까지 후퇴했고, 지휘관 봉상청은 패전의 죄로, 고선지는 후퇴와 착복(억울한 누명이었다)의 죄로 처형되었다. 고숙한이 병마원수에 임명되어 통관에 부임했으나, 병을 이유로 사임하려 했으나 현종에게 거절당했다. 고숙한은 어사중승 전량구에게 지휘를 맡겼으나 통솔이 되지 않았고, 기병을 이끄는 왕사례와 보병을 이끄는 이승광의 대립으로 군의 통제는 더욱 어려웠다.

757년 1월, 안녹산은 그의 맏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당했고, 759년에는 안경서가 안녹산의 부장이던 사사명에게 살해당하면서 안사의 난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3. 3. 사사명의 죽음과 반란의 종식 (759년 ~ 763년)

759년, 안경서는 안녹산의 부장이던 사사명에게 살해당했다.[73] 사사명은 연(燕)의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761년 그의 맏아들 사조의에게 살해당했다.[73]

759년 4월 10일, 안록산이 사사명에게 살해당하자 사사명은 연(燕)의 조무제(昭武帝)로 즉위했다. 사사명은 곧 황후 신(辛)의 아들 사조청(史朝清)을 범양(范陽)의 책임자로 남겨두고 남쪽으로 향했다. 그는 곧 비주(汴州, 현재 허난성 개봉 부근)와 낙양을 함락시켰지만, 하양(河陽, 현재 허난성 교작 부근)과 섬주(陝州, 현재 허난성 산문협 부근)에서 당나라 군대의 저항에 부딪히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사사명은 잔혹하고 살인을 일삼는 인물로 묘사되며, 그의 군대를 공포에 떨게 했다. 그는 사조청을 사조의보다 더 총애했고, 사조청을 황태자로 세우고 사조의를 죽이는 것을 고려했다.

761년 봄, 사사명은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섬주를 다시 공격하려 했다. 그는 사조의를 선봉장으로 삼았지만, 사조의는 당나라 장군 위보옥(衛伯玉)에게 계속해서 격퇴당했다. 사사명은 사조의의 실패에 분노하여 그와 그의 부하 장군들을 처벌하려 했다. 4월 18일, 사사명은 사조의에게 언덕을 한 변으로 하는 삼각형 요새를 건설하여 식량을 비축하도록 명령했고, 하루 안에 완성하라고 명령했다. 하루가 거의 끝날 무렵, 사조의는 요새를 완성했지만 벽에 진흙을 바르지 않았는데, 사사명이 도착하여 진흙을 바르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 그는 자신의 하인들에게 남아서 회반죽 작업을 감독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는 분노하여 "섬주를 함락시킨 후에 너를 죽일 것이다, 도둑놈아!"라고 말했다. 그날 밤, 사조의의 부하 낙월(駱悅)과 채문경(蔡文景)은 그에게 위험에 처해 있으며 사사명을 폐위시키기 위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당나라로 투항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조의는 행동하기로 동의했고, 낙월은 사사명의 호위대장인 조씨 장군(이름 미상)을 설득하여 음모에 동참하게 했다. 그날 밤, 낙월은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사사명을 매복하여 결박한 후 군대와 함께 낙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낙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낙월은 누군가가 사사명을 구출하려 할까 두려워 그를 교살했다. 사조의는 다른 연나라 장군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연의 황제로 즉위했다.

762년 당 현종이 사망하고, 당 숙종 또한 사망하여 당 대종이 즉위했다.[73] 762년이 되자 연나라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 명백해졌고, 연나라 장교와 병사들이 당나라 측으로 투항하기 시작했다. 762년 겨울, 당나라 군대는 동쪽 수도인 낙양을 두 번째로 탈환했다. 사조의는 도망치려 했으나, 763년 초에 붙잡혔다. 사조의는 포로가 되는 것보다 자살을 택하여 763년 2월 17일에 죽었고, 8년간 지속된 반란은 종식되었다.[73]

4. 결과 및 영향

안사의 난은 당나라의 중앙 집권적 관료제를 크게 약화시켰고, 특히 변방 지역에서 그 영향력이 감소했다. 사실상 자치적인 주와 임시 재정 조직이 생겨나면서 장안의 정규 관료제는 힘을 잃었다.[55] 당나라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많은 반란군을 사면했고, 일부에게는 독자적인 수비대를 지휘할 권한까지 주었다. 제국의 광대한 지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통제는 상실되거나 간헐적인 수준으로 떨어졌고, 이 지역들은 절도사(지방 군사 총독)가 이끄는 자치적인 지역 권력, 즉 "절도사"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하북성에서는 하북 삼절도가 당나라 말기까지 사실상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했다.[55]

당나라 정부는 반란을 진압하고 그 후의 혼란을 처리하기 위해 군대를 중국 중부로 철수하면서 서역에 대한 통제력 대부분을 상실했다. 지속적인 군사적, 경제적 약화는 수년 동안 당나라의 영토 통제를 더욱 약화시켰는데, 특히 티베트 제국과의 관계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790년까지 중국은 타림 분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었다.[55]

정치적 쇠퇴와 더불어 경제적 쇠퇴도 발생했는데, 여기에는 위구르 사채업자들에게 막대한 빚을 지게 된 것도 포함된다.[55] 조용조의 옛 조세 제도는 반란 이후 더 이상 기능하지 않았다.

안사의 난은 제국에 정치적, 경제적으로 해로운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지적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많은 지식인들이 경력에 차질을 빚었고, 이로 인해 불안의 원인을 고민하게 되었다. 일부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고 지적 문화의 도덕적 무관심이 반란의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56] 그러나 반란 후 수십 년 동안 당나라 내에서 정치적, 문화적 회복이 일어났고, 당 현종이 죽은 820년경까지 이어졌다.[56] 재건과 회복의 상당 부분은 반란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고 당나라의 통제하에 더 확고히 남아 있던 남쪽의 강남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절도사 제도 때문에, 당나라는 907년 오대십국 시대로 발전했다.[56]

당나라는 안사의 난 수십 년 후에도 권력을 회복하여, 840~847년 몽골의 위구르 카간국 멸망과 같은 공세적인 정복과 원정을 수행할 수 있었다.[56] 예니세이 키르기스의 아르 가문 카간국은 위구르 카간국에 맞서 당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동맹을 강화했다. 이는 한나라 장군 이릉흉노에 투항하여 흉노 공주(협지후 선우의 딸)와 결혼하여 나중에 예니세이가 된 건곤(Ch'ien-K'un) 지역을 통치하도록 보내졌다는 것을 근거로 했다. 이릉은 당나라 이씨 황실이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노자의 후손인 롱시 이씨 가문의 이광의 손자였다.[57] 예니세이 키르기스와 당나라는 840~848년 사이에 몽골의 위구르 카간국과 오르혼 계곡의 중심지를 파괴하기 위한 승리적인 전쟁을 벌였고, 그들의 주장하는 가족적 유대를 동맹의 정당성으로 삼았다.[58] 843년 2월 13일, 사호(살육) 산 전투에서 시웅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군은 위구르 카간(카간) 오가를 부상시키고, 가축을 압수하고, 위구르 카간국 병사 5,000~20,000명을 포로로 잡고, 10,000명을 사살했다.[59][60][61]

밀교 스승인 밀교 불교의 불공(아모가바즈라)은 안록산의 난에서 당나라를 도왔다. 그는 밀교 의식을 통해 안록산의 군대를 초자연적으로 공격하고 파괴하여 안록산의 장군 중 한 명인 주지광(周志光)을 죽이는 데 효과를 보였다고 알려져 있다.[20][21] 756년 장안이 함락되었을 때, 아모가바즈라는 당나라 태자와 현종 황제가 사천으로 피신한 동안 장안에 머물며 안록산을 상대로 의식을 거행했다. 그의 의식은 명백히 안록산에게 죽음, 재앙, 질병을 가져오려는 의도였다.[22] 안록산 진압에 아모가바즈라가 기여한 결과, 밀교는 당나라의 지원을 받는 공식적인 국가 불교 종파, 즉 "황실 불교"가 되었으며, 경전을 쓰고, 사찰과 절을 건설하는 데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아모가바즈라의 제자들은 국가와 황제를 위해 의식을 거행했다.[23] 당나라 숙종 황제는 759년 안록산을 물리친 후 아모가바즈라에 의해 전륜성왕으로 즉위했고, 아모가바즈라는 아칼라 비다라자(Acala vidyaraja)를 안록산에게 불렀다. 당나라 태자 이형(李亨, 후일 숙종)은 안록산이 장안을 점령했을 때 아모가바즈라가 보낸 비밀 메시지를 통해 중요한 군사 정보를 얻었다.[24]

경교 동방 교회의 기독교인들은 박트리아발흐 출신 사제 이시(Yisi)처럼 당나라 장군 곽자의가 안록산의 난을 군사적으로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 이시는 직접 군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며, 경교비에 기록된 것처럼 이시와 동방 교회는 당나라로부터 작위와 지위를 받았다.[11]

당나라 시대 낙양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경교도 소그드인 여성인 안씨(安氏, Lady An)와 그녀의 남편인 한족 경교도 화헌(花獻, Hua Xian)의 묘비명이 있다. 안씨는 821년, 화헌은 827년 사망했다. 한족 기독교 남성들은 기독교를 믿는 한족 여성이 부족하여 같은 민족 내에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제한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11] 낙양에서 또 다른 경교도 소그드인 여성의 묘비명이 발견되었는데, 이 여성도 안씨 성을 가졌으며, 815년 1월 22일에 그녀의 군인 아들이 묘에 안치했다. 이 소그드 여성의 남편은 하(和, He)씨 성을 가진 한족 남성이었으며, 묘비에는 가족이 다민족임이 나타나 있다.[11] 낙양에서 경교도 소그드 여성과 한족 남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자녀들은 다양한 직업 경로를 선택할 수 있었다. 혼혈이거나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았고, 관리나 군인이 될 수 있었으며,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신봉하고 기독교 수도원을 지원할 수 있었다.[11]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소그드 상인들은 중국에서 활발하게 무역을 계속했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민족 정체성을 감추도록 강요받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안충장(安崇張)이 있다. 그는 당나라의 량국공(梁國公)이자 병부상서였는데, 756년에 숙종에게 반란의 지도자와 같은 성씨를 가진 것에 대한 수치심으로 이름을 이보옥(李寶玉)으로 바꾸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62] 이 성씨 변경은 그의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소급 적용되어 그의 조상들도 이씨 성을 받게 되었다.[62]

안사의 난은 당나라의 국력을 크게 손상시켰고, 반란군 유력 장군들에게 절도사 직책을 남발하여 지방 군사 정권(藩鎮(판진), 하삭삼진)이 할거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당나라 정치는 지방 절도사들과의 타협과 대립을 반복하며 쇠퇴해갔다. 또한 당나라가 약화되면서 위구르 제국, 티베트, 거란 등이 대두했다.

안사의 난은 중국과 그 너머에 엄청난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당시 많은 시인들이 전쟁과 반란으로 깊이 영향받은 삶과 감정에 대해 썼지만, 공개적으로 반란에 대해 쓴 시인은 거의 없었다. 755년부터 763년 사이에 쓰인 약 100편의 시 중에서 반란을 언급한 시는 18편에 불과했다.[63]

당시 쓰인 대부분의 시는 반란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일부 시인들은 반란 중의 삶에 대한 경험을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대표적인 인물과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이백(701~762년경)은 반군을 피했지만, 왕족 왕자들 사이의 권력 투쟁에 잘못 휘말려 유배형을 선고받았다가 나중에 사면받았다. 그의 시들은 안사의 난 이전의 황금기, 유배로 가는 길고 의도적인 여정, 그리고 그의 고난, 방황, 환멸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반군이 최종적으로 패배하기 1년 전인 762년에 사망했다.
  • 두보(712~770)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황실 관료직에 임명되었다. 그는 756년 겨울과 757년 여름을 반란군이 점령한 장안에서 포로로 보냈지만,[63] 나중에 탈출하여 숙종 측에 합류하여 반역죄를 피했다. 그의 후기 시는 당시 격변에 대한 주요 정보원이다.
  • 왕창령(698~756?)은 또 다른 당나라 관리이자 저명한 시인으로, 756년경 반란 중에 사망했다.[63]
  • 왕유(약 699~759)는 756년 반군에게 체포되어 낙양으로 보내져 그들의 정부 행정부에서 관리로 일하도록 강요받았고, 충성파에게 체포된 후 잠시 투옥되었다.[63] 반란이 끝나기 전인 759년에서 761년 사이에 사망한 왕유는 남은 생애를 란톈의 시골집에서 은둔하며 보냈다.
  • 삼백당시로 유명한 위응물(737~792)은 "서쪽 시내 추주에서"라는 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시는 당시 흔들리는 국가의 모습에 대한 반응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63]


이후 백거이(772~846)와 같은 시인들도 안사의 난 시대의 사건에 대한 유명한 시를 썼다. 비극적인 사건들은 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으며, 중국과 일본의 여러 세대 화가들은 양귀비가 목욕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나 "촉으로 가는 험난한 길"(즉, 사천으로의 궁궐 행렬)에서 황실의 도피 등 다양한 상징적인 장면들을 묘사했다. 이러한 예술적 주제는 부분적으로 양귀비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겐지 이야기''와 관련하여 일본에서도 주요 영감의 원천이었다.

4. 1. 당나라에 미친 영향

16세기 가노 에이토쿠의 작품, 현종 황제와 그의 후궁 양귀비 및 여러 시종들이 누각에 있는 모습


반란 이전 반세기 동안 실시된 인구 조사는 인구가 점진적으로 증가했음을 보여주는데, 반란 직전인 755년에 실시된 마지막 인구 조사에서는 납세 가구 8,914,709가구에 52,919,309명의 인구가 기록되었다. 그러나 반란 종식 후인 764년에 실시된 인구 조사에서는 가구 2,900,000가구에 16,900,000명만이 기록되었다. 이후 인구 조사는 가구 수만 집계했지만, 855년까지 그 수는 4,955,151가구로 증가했는데, 이는 755년 기록의 절반 조금 넘는 수치였다.[89] 인구 조사 수치의 차이는 3,600만 명에 달하는데, 이는 제국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비록 학자들은 이를 조세 및 인구 조사 수집의 붕괴를 포함한 여러 요인들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큰 인구 감소가 있었음을 의미한다.[90]

3,600만 명이라는 수치는 스티븐 핑커의 저서 ''우리 본성의 더 나은 천사들''에서 사용되었는데, 당시 세계 인구의 6분의 1이 사망한 것으로 역사상 가장 큰 비율의 잔혹 행위로 제시되었다.[91][92] 하지만 핑커는 이 수치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언급했다. 핑커가 3,600만 명이라는 수치를 인용했던 매슈 화이트는 나중에 자신의 저서 ''끔찍한 일들의 아주 큰 책''에서 인구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다른 계산을 통해 이 수치를 1,300만 명으로 수정했다.[93] 화이트의 수정된 수치는 요한 노르베리와 같은 문화사학자들에 의해 반복해서 언급된다.[94][95]

찰스 패트릭 피츠제럴드와 같은 역사학자들은 대규모 인구 감소 주장이 전쟁 당시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이 전쟁은 3~4개의 성에서 간헐적으로 진행되었다.[96] 그들은 전쟁 후 등록부에 기록된 수치는 인구 감소뿐만 아니라 인구 조사 시스템의 정확성 저하와 종교 단체, 외국인, 상인 등 세금을 내지 않는 다양한 계층의 인구가 인구 조사 수치에서 제외된 것을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제국 인구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는 북부 성 여러 곳은 더 이상 황실의 세입 시스템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97] 이러한 이유로,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의 인구 조사 수치는 신뢰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98]

안사의 난은 오호십육국 시대, 황소의 난, 오대십국 시대의 전쟁, 금송전쟁과 함께 중국 북부의 여러 전쟁 중 하나였는데, 이 전쟁들은 한족의 대규모 남쪽 이주(衣冠南渡, yì guān nán dù)를 야기했다.[99][100][101][102][103][104] 이러한 대규모 이주는 북부와 달리 평화를 유지한 남부 중국의 인구 증가, 경제, 농업 및 문화 발전으로 이어졌다.[105][106][107][108][109][110][111]

결국 당나라는 조세 제도는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뀌었다. 난 이후로 경제가 발달하여 재정이 복잡해 지자, 탁지낭중의 지위가 향상하여 탁지사(度支使)라 하게 되고, 재무관청인 탁지(度支)가 호부(戶部), 염철(鹽鐵)과 함께 재정을 취급하는 3개의 중요 기관이 된다.[112]

수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 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결국 875년 황소의 난을 거쳐 당나라는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였다. (당은 안사의 난으로 인해 제도와 지배력등이 많이 떨어지게 되었지만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 덕분에 명맥을 유지했으나 황소의 난으로 인해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113]

4. 2.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

안사의 난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 내부에서는 반란 진압 이후에도 혼란이 계속되었다. 당나라에 항복한 안사의 난 장군들은 절도사로서 독립적인 군사력을 유지하며 당나라 중앙 정부에 대항했다. 이는 당나라 말기까지 이어지는 혼란의 시대를 열었다.

760년에는 옛 연(燕)의 장군 천승공(田承貢)이 양주 대학살을 일으켰다.[49] 그는 당나라에 투항하여 자신의 영토를 유지하고 지역 군벌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이 전쟁을 연(燕)의 반란을 일으킨 호(胡)족 야만인과 당나라 한족 사이의 전쟁으로 묘사했기 때문에, 천승공은 자신이 한족 당나라에 충성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외국인들을 제물로 학살했다. 그는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 호족들도 특정 민족이 아닌 모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학살했다. [26]

761년에는 고구려 출신 옛 연(燕)의 장군 고거인(高句仁)이 집성(지금의 베이징)에서 소그드인들을 대량 학살했다.[50][51] 그들은 큰 코로 식별되었으며, 그들의 아이들은 창으로 찔렸다. 천승공과 마찬가지로 고거인도 당나라에 투항하여 지역 군벌로 인정받기를 원했다고 "안록산사기(安祿山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26]

이러한 혼란 속에 위구르 제국과 티베트가 성장했다.

  • '''위구르 제국'''


756년 위구르 카간국은 안사의 난에 맞서 동맹을 맺기 위해 당나라와 공주를 맞바꾸는 결혼을 했다. 위구르 카간 바얀추르 칸은 그의 딸인 위구르 공주 피자(毗伽公主)를 당나라의 빈왕 이수리의 아들인 돈황왕(敦煌王) 이승채(李承采)와 결혼시켰고, 당나라 공주는 위구르 카간 바얀추르와 결혼했다.

778년, 위구르의 부구 카간(牟羽可汗)이 당나라를 침공하였다. 이듬해 779년, 소그드인 관리의 건의로 부구는 당나라를 침공하려 하였으나, 재상인 돈막하달간(頓莫賀達干)이 부구 카간과 소그드인 관리들을 살해하고, 알프 꾸틀룩 빌게 카간(合骨咄禄毘伽可汗)으로 즉위하였다. 알프 꾸틀룩 빌게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또한 알프 꾸틀룩 빌게는 전임 부구 카간이 믿었던 마니교를 탄압하고, 소그드인에게도 압력을 가했으며, 국호를 회흘에서 '''회흘'''로 바꾸었다.

789년에는 티베트 군대가 그동안 위구르에 복속되어 있던 백복돌궐과 칼륵과 연합하여 북정대도호부가 있던 비슈발리크(북정)을 공격하여 현지 위구르-당나라 군대를 승리하였다.[75] 위구르 군대는 몽골 지역까지 후퇴하였고,[75] 위구르 측에 있던 사타부도 티베트에 항복하였다. 이 북정 쟁탈전은 792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위구르가 승리하여 투루판 분지를 포함한 동부 천산 지역 전역이 위구르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타림 분지 북쪽은 위구르 영토, 타림 분지 남쪽은 티베트 영토가 되었다.[76]

791년, 위구르는 북정을 탈환하고, 또한 당나라 군대와 함께 염주·영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토번의 수령을 사로잡았다. 이후 타림 분지~하서 지역~롱유~막남 일대를 둘러싼 전쟁은 50년 동안 계속되었다.

811년, 위구르·당나라 군대에 의한 두 번째 북정도호부 탈환과 준가르 분지 제압으로 칼륵이 위구르에 복속되면서, 점차 위구르 측의 승세가 기울었다. 840년경에는 하서·롱유·서역 전역을 탈환당하고, 위구르와 강화하였다.

821년, 연합을 도모하기 위해 당나라에서 공주가 시집왔다.

  • '''티베트 제국'''


763년 티베트 제국의 트리송 데첸은 당나라의 약점을 이용하여 장안을 잠시 점령했고, 이후 중앙아시아의 당나라 영토 대부분을 정복했다.

779년티베트·난자오 연합군은 20만 대군으로 成都 점령을 목표로 했지만, 국력을 회복한 당나라 군대에 격퇴되었다. 그러나 786년에는 돈황을 점령하고, 河西回廊(하서회랑)을 장악했다.[75] 이후, 타림 분지 남쪽 가장자리로 진출했다.[75]

809년에 토번이 다시 영주에서 풍주 일대를 제압하여, 회흘과 당나라 사이의 직도(참천가한도)를 차단하였다.

813년, 위구르가 막남에서 토번 군대를 격파하고 승세를 타고 하서까지 추격하였으나, 816년에는 토번 군대가 아장에서 3일 거리까지 진군하여 주변 지역도 제압하였다.

824년에 토번과 당이 정전에 이른 이후로는, 주로 서부에서 전투가 행해졌고, 840년에 화목할 때까지 막남을 탈환하고 하서 지역을 정복하였다.

821년, 위구르, 티베트, 당(唐) 사이에 삼국회맹이 체결되었다. 당시 당, 티베트, 위구르의 국경은 청수현의 진주천수원주를 잇는 남북의 선이 당과 티베트의 국경선이었고, 동서로 뻗은 고비사막이 위구르와 티베트의 국경이었다.

안사의 난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758년 발해에서 귀국한 오노다 모리가 일본 조정에 반란 발생과 장안 함락, 발해가 당으로부터 원군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당시의 후지와라 츄마로 정권은 반란군이 일본 등 주변 국가에 파병할 가능성을 고려하여 대재부에 경계 태세 강화를 명령했다.[80] 또한 당나라의 대외 영향력 저하를 예상하고 신라 정벌 계획을 준비했지만, 츄마로가 처형되면서 중지되었다.

참조

[1] 서적 Essays on Tʻang society: the interplay of social, political and economic forces Brill
[2] 웹사이트 What Was the An Lushan Rebellion? https://www.thoughtc[...]
[3] 간행물 Images on Chinese popular religion altars of the heroes involved in the suppression of the An Lushan Rebellion [AD 755–763]
[4] 서적 Histoire de Ngan Lou-chan https://books.google[...]
[5] 서적
[6] 서적 Fang Guan's Chariots: Scholarship, War, and Character Assassination in the MiddleTang https://www2.ihp.sin[...]
[7] 서적 中华上下五千年 吉林出版集团有限责任公司
[8] 서적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ume 5,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art 4, Spagyrical Discovery and Invention: Apparatus, Theories and Gift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0-01-01
[9] 서적 The First Chinese Travel Record on the Arab World: Commercial and Diplomatic Communications during the Islamic Golden Age https://www.kfcris.c[...] King Faisal Center For Research and Islamic Studies
[10] 서적 Ambassadors from the Islands of Immortals: China–Japan Relations in the Han-Tang Period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5-01-01
[11] Dissertation Negotiating Belonging: The Church of the East's Contested Identity in Tang China https://utd-ir.tdl.o[...] The University of Texas at Dallas 2019-05-01
[12] 간행물 Silk Road Christians and the Translation of Culture in Tang China https://cambridge.or[...] Published online b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05-26
[13] 서적 Translation by Max Deeg, 'A Belligerent Priest: Yisi and His Political Context', in Tang and Winkler, eds, From the Oxus River, 109–10 (with typographical corrections and with slight modifications based on Eccles and Lieu, 'Stele on the Diffusion of the Luminous Religion'); text and punctuation follows Pelliot, L'Inscription nestorienne.
[14] 서적 From the Oxus River to the Chinese Shores: Studies on East Syriac Christianity in China and Central Asia LIT Verlag Münster 2013-01-01
[15] 간행물 The Rhetoric of Antiquity. Politico-Religious Propaganda in the Nestorian Steleof Chang'an 安長 2007-01-01
[16] 서적 Persian Christians at the Chinese Court: The Xi'an Stele and the Early Medieval Church of the East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8-01-01
[17] 간행물 Jingjiao under the Lenses of Chinese Political Theology
[18] 서적 Rooted in Hope: China – Religion – Christianity Vol 1: Festschrift in Honor of Roman Malek S.V.D. on the Occasion of His 65th Birthday Routledge 2017-01-01
[19] 뉴스 Christmas Celebrated in Ancient China Over 1000 Years Ago? http://chinachristia[...] 2019-12-24
[20] 서적 Esoteric Buddhism in Mediaeval Maritime Asia: Networks of Masters, Texts, Icons https://books.google[...] ISEAS-Yusof Ishak Institute 2016-01-01
[21] 간행물 Appreciation of Relics, Stupas, and Relic Stupas in Eighth Century Esoteric Buddhism: Taisho Tripitaka Texts and Archaeological Residues in Guhya Lanka_Part 2 https://www.academia[...] 2018-01-01
[22] 서적 Chinese Esoteric Buddhism: Amoghavajra, the Ruling Elite, and the Emergence of a Tradition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9-01-01
[23] 서적 Chinese Esoteric Buddhism: Amoghavajra, the Ruling Elite, and the Emergence of a Tradition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9-01-01
[24] 서적 The Spread of Buddhism Brill 2007-01-01
[25] 서적 Biography of An Lu-shan, Issue 8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60-01-01
[26] A thesis submitted to the Faculty of Graduate Studies and Research in partial fulfillment of the requirements for the degree of Master of Arts Department of History and Classics The An Shi Rebellion and Rejection of the Other in Tang China, 618–763 https://era.library.[...] University of Alberta 2012-09-01
[27] 서적 A History of East Asia: From the Origins of Civilization to the Twenty-First Centu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01-01
[28] 간행물 The Population Statistics of China, A.D. 2–1953
[29] 서적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30] 서적
[31] 서적 The Great Big Book of Horrible Things: The Definitive Chronicle of History's 100 Worst Atrocities W. W. Norton & Company
[32] 서적 Progress: Ten Reasons to Look Forward to the Future Oneworld Publications
[33] 서적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ulture Purdue University Press
[34] 서적 China: A Short Cultural History https://archive.org/[...]
[35] 서적
[36] 서적 yì guān nán dù 2013-08-09
[37] 웹사이트 唐宋时期的北人南迁 内蒙古教育出版社官网 2013-08-09
[38] 웹사이트 六朝时期北人南迁及蛮族的流布 内蒙古教育出版社官网 2013-08-09
[39] 웹사이트 东晋建康的开始—永嘉南渡 通南京网 2013-08-09
[40] 웹사이트 从衣冠南渡到西部大开发 中国期刊网 2013-08-12
[41] 서적 全唐诗 中华书局 1999-01-01
[42] 서적 Nanjing: Historical Landscape and Its Planning from Geographical Perspective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6
[43] 백과사전 Six Dynasties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lnc. 2008
[44] 서적 Migration and settlement in Sichuan, 1644–1796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1982
[45] 서적 Agricultural Development in Qing China: A Quantitative Study, 1661–1911 https://books.google[...] Brill 2017
[46] 서적 China: A New Cultural History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2
[47] 서적 The History of China https://books.google[...] The Rosen Publishing Group, Inc 2010
[48] 서적 Chinese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Volume 3 https://books.google[...] 2004
[49] 서적 The earliest Muslim communities in China https://www.kfcris.c[...] King Faisal Center For Research and Islamic Studies 2017
[50] 학술지 New Work on the Sogdians, the Most Important Traders on the Silk Road, A.D. 500–1000 2003
[51] 서적 The Silk Road: A New Histo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52] 서적 Sogdian Traders: A History https://books.google[...] Brill 2018
[53] 웹사이트 成德军的诞生:为什么说成德军继承了安史集团的主要遗产 https://www.163.com/[...] 2020-02-08
[54] 서적 危机与重构:唐帝国及其地方诸侯 https://books.google[...] 2015-08-01
[55] 학술지 Striving for Completeness: Quan Deyu and the Evolution of the Tang Intellectual Mainstream Harvard-Yenching Institute 2001
[56] 학술지 Striving for Completeness: Quan Deyu and the Evolution of the Tang Intellectual Mainstream 2001
[57] 서적 Tang China And The Collapse Of The Uighur Empire: A Documentary History https://books.google[...] Brill 2005
[58] 학술지 Breaking the Orkhon Tradition: Kirghiz Adherence to the Yenisei Region after A. D. 840 https://www.jstor.or[...] 2021-09-04
[59] 서적 Tang China And The Collapse Of The Uighur Empire: A Documentary History https://books.google[...] Brill 2005
[60] 서적 Warfare in Inner Asian History (500–1800) https://books.google[...] Brill 2018
[61] 서적 Warfare in Inner Asian History (500–1800) https://books.google[...] Brill 2018
[62] 서적 Transnationalism in Ancient and Medieval Societies, the Role of Cross Border Trade and Travel McFarland & Company 2012
[63] 논문 The Royal Asiatic Society (Hong Kong Branch): the faces, the stories and the memories The University of Hong Kong Libraries 2001
[64] 서적 興亡の世界史5 シルクロードと唐帝国 講談社 2007
[65] 서적 興亡の世界史5 シルクロードと唐帝国 2007
[66] 서적 興亡の世界史5 シルクロードと唐帝国 2007
[67] 서적 興亡の世界史5 シルクロードと唐帝国 2007
[68] 서적 Ethnic Identity and National Conflict in China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8-05-09
[69] 서적 The religious traditions of Asia: religion, history, and culture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2002
[70] 서적 China: a short cultural history https://books.google[...] Praeger 1961
[71] 서적 The Muslim Diaspora: A Comprehensive Reference to the Spread of Islam in Asia, Africa, Europe, and the Americas https://books.google[...] McFarland
[72] 서적 Embers in Cathay https://books.google[...] Doubleday
[73] 서적 森安2007
[74] 서적 森安2007
[75] 서적 森安2007
[76] 서적 森安2007
[77] 간행물 沙州漢人による吐蕃二軍団の成立とmKhar tsan軍団の位置
[78] 서적 森安2007
[79] 서적 森安2007
[80] 서적 続日本紀
[81] 서적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82] 서적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83] 서적 Progress: Ten Reasons to Look Forward to the Future https://books.google[...] Oneworld Publications 2016-09-01
[84] 서적 The Sociology of Revolution http://users.erols.c[...] H. Fertig
[85] 서적 Essays on Tʻang society: the interplay of social, political and economic forces Brill Archive
[86] 웹사이트 What Was the An Lushan Rebellion? https://www.thoughtc[...] 2019
[87] 웹사이트 An Lushan Rebellion 安史之亂 http://www.chinaknow[...] 2024-03-22
[88]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89] 저널 The Population Statistics of China, A.D. 2–1953
[90] 서적
[91] 서적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92] 서적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93] 서적 The Great Big Book of Horrible Things: The Definitive Chronicle of History's 100 Worst Atrocities https://archive.org/[...] W. W. Norton & Company
[94] 서적 Progress: Ten Reasons to Look Forward to the Future https://archive.org/[...] Oneworld Publications
[95] 서적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ulture Purdue University Press
[96] 서적 China: A Short Cultural History https://archive.org/[...]
[97] 서적
[98] 서적
[99] 웹사이트 yì guān nán dù 2013-08-09
[100] 웹사이트 唐宋时期的北人南迁 2013-08-09
[101] 웹사이트 六朝时期北人南迁及蛮族的流布 2013-08-09
[102] 웹사이트 东晋建康的开始—永嘉南渡 2013-08-09
[103] 웹사이트 从衣冠南渡到西部大开发 2013-08-12
[104] 서적 全唐诗 中华书局
[105] 서적 Nanjing: Historical Landscape and Its Planning from Geographical Perspective https://books.google[...] Springer
[106] 백과사전 Six Dynasties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08-12-04
[107] 서적 Migration and settlement in Sichuan, 1644–1796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1982
[108] 서적 Agricultural Development in Qing China: A Quantitative Study, 1661–1911 https://books.google[...] Brill 2017
[109] 서적 China: A New Cultural History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2
[110] 서적 The History of China https://books.google[...] The Rosen Publishing Group, Inc 2010
[111] 서적 Chinese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Volume 3 https://books.google[...] 2004
[112] 웹인용 재정법제연구(I) 의회·행정부 관계와 예산권한 배분에 관한 연구 https://www.klri.re.[...] 한국법제연구원 2018-10-31
[113] 백과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